사랑은 나누고

말씀을 배우며

복음을 전하는 교회

말씀과 훈련

말씀은 우리의 훈련장입니다.
성도들은 말씀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며,
받은 은혜를 세상 속 사명으로 연결합니다.

누가복음 12장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가르치실 때 한 사람이 "우리 형을 명하여 내 유산을 나누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형이 자기의 모든 유산을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얼핏 보면 유산을 형에게 빼앗긴 억울한 동생이 억울함을 풀기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을 위로하거나 편을 들지 않고 오히려 책망하십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왜 이 사람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대신에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형에게 빼앗긴 유산을 찾을 수 있을까 그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돈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탐심이란 돈이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는 상태입니다. 탐심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관심의 문제고, 마음과 생각의 문제입니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다 할지라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돈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이미 우리 마음은 탐심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 사람의 또 다른 문제점은 관계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 앞에서 형이 독차지한 유산을 돌려받게 해달라고 한 것은 형과의 관계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데서 온 행동입니다. 형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돈은 손해 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관계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탐심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탐심에 사로잡혀 관계보다 돈을 더 선택하고 있습니다. 수년 전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에 많지도 않은 유산 문제로 제 마음이 좀 불편했습니다. 형님댁에서 아버지의 재산 대부분을 물려받았는데, 평생 아버지를 모셨기에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뭔가 손해를 봤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돈이 아닌 관계를 선택할 수 있게 하셨지만 제 속에 잠자고 있는 탐심을 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관계가 뒤틀린 채 돈을 차지하면 정말 행복할까요?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탐심에 사로잡혀서 관계보다 돈을 택함으로 돈은 지키지만 관계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 말씀하십니다. 참된 행복과 만족은 돈이 주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좋은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이 아닌 관계가 행복의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일단 우리 마음이 탐심에 사로잡히면 돈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됩니다. 돈이 목적이 되면 나머지는 다 돈을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립니다. 수단은 버릴 수 있어도 목적은 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돈이 목적이 되면 절대 돈을 버리지 못합니다. 돈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말씀을 버리고, 부모도 형제도 이웃도 버리게 됩니다. 돈을 목적의 자리에서 본래의 자리인 수단의 자리로 돌려놓아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사랑하는 탐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은혜 받아야 됩니다. 은혜 받았다는 것은 예배 중에 말씀을 듣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시고, 예수의 죽음이 나를 위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돈을 날마다 경험하는데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니까 마음이 돈으로 쏠리게 됩니다. 은혜를 경험해야 마음과 생각이 돈으로 쏠리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탐심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마음이 물질에 사로잡힌 탐심은 우리 마음이 은혜에 사로잡힌 은혜의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가 무엇을 듣는가가 우리의 믿음을 결정합니다. 말씀에 관심이 없어서 말씀 듣지 않고 돈의 가치를 둔 세상의 소리를 계속해서 들으면 우리 속에 돈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그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듣게 되면 돈에 대한 믿음이 강력해지고 깊어집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돈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되는 데까지 이릅니다. 우리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돈의 위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 예배에 집중해야 됩니다. 말씀 듣고 읽고 묵상하며 은혜 받는 일에 더 힘써야 됩니다. 기도하며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됩니다. 코로나를 지나면서 교회가 굉장히 힘을 잃고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말씀 듣는 일에 소홀하게 되고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 때문에 믿음이 점점 약해지고 어느 순간에 믿음을 잃어버려서 교회를 떠나버리는 현상들이 나타났습니다.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면 돈의 만족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를 경험하면 은혜에서 만족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마음이 채워지면 돈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돈이 필요하니까 돈은 쓰지만 돈을 수단으로 생각하지 목적으로는 삼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 말씀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돈의 특징은 우리를 버리고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지극히 사랑하지만 돈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겠다 약속하십니다. 돈이 주는 만족은 잠깐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만족은 영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 당부를 남기면서 디모데전서 6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둬야 합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그것이 탐심을 벗고 참된 만족과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은혜를 경험하고 그 은혜의 힘으로 탐심을 물리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하며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목희 목사

고린도후서 9장 10절 말씀입니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풍성히 하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씨와 양식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씨는 심는 것이고 양식은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물질, 건강, 시간, 은사 이러한 것들을 통칭하여 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우리가 먹고 누리게 하기 위한 양식이 있고, 또한 우리를 통해서 심기를 원하시는 씨가 있습니다. 양식은 나를 위해서 감사함으로 누리고 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씨는 내가 사용하면 안 됩니다. 씨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심기 위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복을 씨와 양식으로 구분하는 것이 먼저 중요합니다. 양식은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되, 씨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심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복을 씨와 양식으로 구별하지 않고 다 양식으로 삼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더 풍성하게 주시면 씨를 늘리지 않고 양식을 늘립니다. 집을 넓히고 차를 업그레이드하고 즐길 거리를 늘리는 데 마음을 쏟습니다. 교회도 더 화려하게 건축하고 치장하는 데 마음을 쏟습니다. 하나님이 더 많은 복을 주시는 이유는 더 많은 양식을 늘리라는 것이 아니라 씨를 더 늘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내라는 데 뜻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을 씨와 양식의 비율을 잘 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이니."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헌금을 많이 하면 복 많이 받고 적게 하면 복 못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맥락은 많이 심으면 풍성한 열매를 거두고 적게 심으면 거둘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씨를 늘려서 많이 심을 것을 권고하는 것입니다. 내가 심어서 다른 사람이 거두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내가 심지 않은 것을 내가 거두는 것을 성경은 은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씨를 구별하여 심으면 심지 않는 사람들이 거두는 은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우리의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씨로 구별하고 심고 나누어 주신 그 씨의 열매로 오늘 우리가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누리는 신령한 복도 100여 년 전 서구 교회가 자신들이 받은 복을 자기들만 누리지 않고 조선을 위해 복음을 심어준 그 씨의 열매를 오늘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풍성한 자가 심어 부족한 자가 거두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부족한 자들을 풍성케 하는 방법입니다. 생각이 변하는 것, 가치관이 변하는 것이 성경적인 의미의 변화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주신 모든 복을 내 양식으로만 생각했던 생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 속에는 내가 먹는 양식도 있지만 하나님 뜻대로 심어야 할 씨도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 복 주시면 이것 중에 내가 씨를 구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 열방을 위해 심어야지 하는 가치관의 변화를 가질 때 우리는 변화 받은 사람입니다. 선한 영향력은 씨를 늘리는 데서 옵니다. 양식을 늘리는 것으로는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가 세상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잃어버린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씨를 늘리는 데 마음을 두지 않고 양식을 늘리고 교회 짓고 우리 안에서 누리는 것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은 씨를 심어야 할 이유를 "균등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심어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혜택을 받으면 균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을 자기의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 머릿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복 속에는 씨가 있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복을 말할 때 사명과 연관 지어 말합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는 그 복이 개인의 행복과도 관계가 있지만, 더 크게는 우리의 사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이유는 착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을 착한 일을 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복받은 사람의 사명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받은 복을 씨로 심는 것이 착한 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씨가 되어 이 땅에 심어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심은 그 씨로 인해 2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공로로 구원받고 우리도 영생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 복 주실 때 그 복을 내 양식으로만 삼고 싶은 욕심을 이기고 이 복 속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심어야 할 씨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씨를 구별하여 심을 때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농부는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씨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그 씨를 먹고 나면 내년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씨가 소망입니다. 씨를 구별해서 심어야 내일의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면 그 복 중에는 내가 먹을 양식도 있지만 내가 심어야 하는 씨도 함께 있습니다. 씨와 양식을 잘 구별하여 양식은 감사함으로 누리고, 씨는 하나님 나라와 이웃과 열방을 위해서 믿음으로 심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풍성케 하실 때 내가 먹을 양식을 지나치게 늘리지 말고 씨를 더 늘리는 일에 마음을 두십시오. 그것이 착한 일을 하는 착한 성도입니다. 김목희 목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미" 배가 불렀고, "이미" 부유해졌고, "이미" 왕이 되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자랑했고, 세상의 비교와 차별의 방식을 그대로 교회 안으로 가져왔습니다. 바울은 묻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 중 받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고린도 성도들은 경쟁에서 뒤처진 변두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로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는 흐릿해졌고, 자신들이 가진 은사를 마치 스스로 얻은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바울은 신랄하게 대조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왕이 되었군요. 우리는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정처 없이 떠돕니다. 욕을 먹어도 우리는 복을 빌어줍니다." 구원은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왕 같은 영광은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때에 주어질 것입니다. 지금은 고난을 견디며 십자가를 지는 시간입니다. 산상수훈은 말합니다. "자발적으로 가진 것을 포기하여 가난을 선택한 자는 복이 있나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자랑의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내려놓고, 나누고,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난을 스스로 선택하고 견디면서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신실하게 축복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종, 청지기의 태도입니다.

야곱이 간 곳은 고센입니다. 고센은 변두리입니다. 천대받는 땅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가증하게 여기는 땅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살게 됩니다. 성경에서 고센과 닮은 땅에서 하나님의 환상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이 살던 곳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도 아니었습니다. 그발 강가였습니다. 포로수용소였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외면하던 땅이었습니다. 애굽에서 고센이 천대받는 땅이었다면, 바벨론에서 그발 강가는 희망이 끊긴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눈부신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무너진 성전이 아니라, 물이 차오르는 성전을 보여 주십니다. 그 물이 에스겔의 발목까지 차오릅니다. 무릎까지 차오릅니다. 가슴까지 차오릅니다. 그리고 그 물은 성전 동쪽 문을 통해 흘러갑니다. 멈추지 않습니다. 가둘 수도 없습니다. 죽은 땅을 적시고, 메마른 곳을 살리고, 생명이 끊긴 자리에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발 강의 썩은 물을 보면서 생활하던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성전에서 흐르는 맑은 물을 보여 주셨습니다. 소망입니다. 전준식목사

예수님은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에게 주노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전에는 이런 계명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을 보면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미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이 구역 성경에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 앞에 새 계명이라는 말을 첨부했을까요? 레위기에서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신 분은 여호와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가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의 범위는 유대인까지입니다. 그래서 이 계명은 옛 계명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새 계명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유대인을 넘어서는 이웃입니다. 그래서 새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레위기에 근거하면 레위인과 제사장은 이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도움을 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당시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이웃의 범주를 자신을 이방인 취급했던 사람에게까지 넓힌 것입니다. 전준식 목사

우리는 기도를 마칠 때 예수님의 이름 기도합니다, 라고 고백하고 기도를 마칩니다. 이 말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웃을 위하여 책임을 지겠다고 결심하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십시오. 양과 같은 사람은 이웃을 책임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양과 같은 사람들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목마른 사람들에게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 헐벗은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을 돌아보았습니다. 이웃을 향한 연민과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준식 목사

유다는 한 가정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전체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유다는 한 사람의 죄를 대신 지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유다는 공동체를 살렸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살리셨습니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비추는 그림자입니다. 그리스도는 유다가 보여준 길을 완성하셨습니다. 유다가 한 가정을 살렸다면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유다는 가정을 책임을 지려고 했다면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책임지셨습니다. 여러분! 은잔을 내려놓으십시오. 그 은잔을 손에서 떨어뜨리십시오. 그리고 십자가 앞으로 걸어오십시오.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거기서 믿음이 다시 살아납니다. 전준식 목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창한 희생이나 큰 결단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요단 강 안에 한 발을 넣는 것입니다. 헌금은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한 걸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 걸음.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한 걸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한 걸음입니다. 그 한 걸음을 내딛어 보십시오. 요단강 앞에서 여러분의 발 하나를 담그십시오. 요단이 갈라지고 하늘 문이 열립니다. 추수감사주일, 막힌 하늘이 열릴 것이고 닫힌 문이 열릴 것이고 메마른 땅에서 새 생명의 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신림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전준식 목사

하나님은 이 아침에 우리에게 이 냄새를 보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낸 냄새는 십자가의 냄새입니다. 보혈의 냄새입니다. 구원의 향기입니다. 세상은 성공의 냄새를 좇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따라갑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서 살고 있습니까? 애굽의 궁정입니까, 바벨론의 거리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의 향수는 물립니다. 고향의 냄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냄새는 물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본향의 냄새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보낸 향품은 고향의 냄새였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늘의 냄새입니다. 이 향기를 잃지 마십시오. 이 향기가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퍼져나가기를 축복합니다. 전준식 목사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에서 양식을 조금 사오라” 고 말합니다. 우리도 야곱과 같습니다. 삶이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우리도 이렇게 말합니다. 조금 해보겠습니다. 기도 좀 해보겠습니다. 헌신 좀 하겠습니다. 봉사 좀 하겠습니다. 믿고 싶지만 다 믿을 수 없고, 가고 싶지만 끝까지 갈 용기가 없는, 그 모순된 마음이 ‘조금’ 이라는 단어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조금’을 존중합니다. 그 ‘조금’으로도 일하십니다. ‘조금’을 위하여 애굽에 간 야곱의 아들들은 거기서 요셉을 만나고 야곱이 요셉을 만나는 길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조금’ 을 ‘전부’를 살리는 신앙으로 성장하게 하십니다. 전준식 목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사람을 살리고,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줍니다. 신명기 30장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가 너희들 앞에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를 두었다. 너희들은 무엇을 선택할 래?” 사무엘상 24장을 보면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살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내일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출근해야 합니다. 남들보다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출근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생명을 살리는 사람으로 출근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으로 출근해야 합니다. 전준식 목사

성도에게는 3일이라는 시간은 바로 고통 속에서 회복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여러분, 3일을 피하지 마십시오. 어제의 감옥이 오늘의 성전이 되고, 어제의 눈물이 내일의 부활을 부름을 믿으십시오. 십자가가 부활로 뒤집힌 것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삶을 뒤집으십니다. 옷을 보지 말고 옷 안에 있는 나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흘의 끝에서 우리를 일으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전준식목사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팔아넘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들을, 요셉의 형제들을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야곱의 아들들로, 죄인으로 인생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들을, 가해자 요셉의 형제들을 심판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용서의 자리로 이끄시기 위함입니다. 결국 형들은 용서를 받습니다. 호세아의 부인 고멜을 보십시오. 배신과 음행을 거듭한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고멜을 아내라고 부르십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때로 가해자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를 팔아넘기고, 누군가를 외면한 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는 길을 주십니다. 그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전준식 목사

세상이 빵을 찾을 때 교회도 빵을 찾고 있습니다. 세상은 성공을 쫓아가자 교회도 성공하자고 설교 합니다. 세상이 돈을 추구하면, 교회도 돈 이야기를 합니다. 북한 김일성이 3대째 세습을 하는 것을 보면서 교회도 북한처럼 세습을 합니다. 이전에는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제는 아예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영적인 암흑의 시대에 빛으로 사는 신림교회가 되기를!

양육

말씀과 사랑 안에서 자라며
믿음의 군사로 준비됩니다

선교

예배와 훈련을 통해 지역과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로 세워집니다.

교회 이야기

교회의 이야기를 함께 그려가며, 서로 나누고 사랑으로 전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영아부 성탄전야제
25년 스콜라학당 가을학기 개강식
#교회시설
여기는 어디일까요?
#행사
#행사
14일부터 19일까지 미얀마로 아웃리치를 갑니다.
지진으로 인해 어려운 그 땅에 작은 도움이지만 큰 희망을 줄 수 있도록 많은 기도 부틱드립니다.
#행사
26일부터 31일(목)까지 베트남 하노이에서 베트남 현지 학생들을 위한 한국어캠프 및 한국문화 교류 행사를 합니다.
#행사
신림교회 청소년부들 친구들이 25일부터 오늘 27일까지 '편지'라는 주제를 가지고 
평창 어름치캠프학교에서 여름성경학교를 가졌습니다.

짦은 기간이지만 이번에 알게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친구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고 맘 속에 자리잡히길 기도합니다.
#행사
#행사
#행사
#행사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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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주보